소셜전략 71. 이시대 양심의 최후 보루는 어디입니까?

[ 이시대 양심의 최후 보루는 어디입니까?]

감사원의 전국 12개 국립대 교수들의 연구비 유용실태 조사 결과입니다.  조사 결과 32건의 비리를 적발했고, 관련 교수 등 19명에 대해선 파면, 해임, 징계·문책 등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
연구비는 연구를 위해서 사용해야 할 공적인 자금입니다. 개인적인 용도로 연구와 무관하게 사용해서는 안되는 돈입니다.
그런데 이 연구비의 사용실태를 보니 많은 문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번에 들어난 연구비 유용실태입니다. ( http://bit.ly/1edEDGv 참조)

  1. 전북대 A교수 : 48명의 연구원 통장 본인이 관리, 이중 11명 허위 등록 , 인건비 10억여원 중 5억 8천만원을 마음대로 사용
  2. 경북대의 C교수 :  빼돌린 연구비로 주식투자 3억 여원을 빼돌리고 이 중 약 2억 6천만원을 주식투자 등에 사용
  3. 부경대 D교수 :  군복무중인 아들 연구비 계속 받아
  4. KAIST D교수 :  집에서 피자 배달과 외국 장난감 구입 등에 3천6백만원을 사용 (그는 연구비로 6억여원을 받음)
  5. 충남대 F교수 : 12명 허위 연구원 등록 후 이들의 인건비 9700만원으로 카드대금, 자녀 등록비 등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
  6. 서울대 I교수 : 약 2년간 29명의 연구비 9억 8천만원 중 7억 2천만원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

대다수의 선량한 교수들이 이들로 인해서 피해를 보아서는 안되겠지만 전국적으로 유사한 일이 발생한 것을 보아서는 어느 정도 만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게 됩니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연구비의 사사로운 사용이 감사원 조사 전에는 대학내부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지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자정 기능을 잃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스스로 깨끗하게 못한다면 외부의 힘을 빌릴 수 밖에 없습니다.

물론 대다수의 교수들은 이렇게 비양심적인 일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행동하는 지성이나 이 시대의 양심과 같은 말은 더 이상 대학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스스로 비양심적이면서 어떻게 양심이나 정의의 기준으로 사회에 대해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더 이상 이사회의 파수군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시대 우리나라의 양심의 최후의 보루는 어디일까요?
대학도 아니고 , 종교도 아니고 , 이제는 시대 양심을 그 사회의 특정 주체에게 맡기고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시대는 아닌 것 같습니다. 과연 어디가 이 시대 양심의 보루인지 혼미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정을 저지른 저 교수들이 과연 처음부터 비양심적이고 나쁜 사람이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에는 규정대로 하려고 노력을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양심에 따른 노력이 의미가 없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 둘 작은 부정을 하면서 점점 양심이 마비되고 더 큰 부정을 저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비호하려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의 행동 이면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 시대 양심의 보루를 찾는 일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2004년 아부그라이브교도소에서 이라크포로 학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라크 포로들을 괴롭히고 학대한 많은 병사들은 지극히 평범한 병사들이었습니다. 그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는 양심적이고 모범적인 시민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전쟁 상황 속에서 특정한 교도소라는 시스템 안에 들어가자 자신들의 양심을 잃고 그 시스템에 동화 되었습니다.

아부그라이브 교도소 이라크 포로 학대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이라크 포로 학대

스탠포드대의 짐바르도교수의 죄수와 간수 모의 실험에서도 이런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런 것을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라고 합니다. 선량하고 평범한 사람이 악한 일을 저지르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썩은 사과상자이론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사과상자 안에 썩은 사과가 있으면 다른 사과들도 쉽게 썩게 만들게 된다고 합니다. 썩은 사과로 인해 사과 상자자체가 오염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리 깨끗한 사과를 그 상자 안에 집어 넣어도 쉬 상하게 만듭니다.

왜 대학교에서 이런 일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것인가요?
문제 있는 개개인 즉, ‘썩은 사과’가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라 잘못된 환경 즉, ‘썩은 상자’가 강력한 영향으로 개인들의 성격을 변화시킨다고 합니다.
썩은 상자는 집단동조로 상자 속 사과들을 오염시키게 됩니다. 이는 인간이 고립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집단 속 타인들과 행동을 같이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부정을 저지르고 그것이 전체 연구비 사용 문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교수들도 , 그 밑의 학생들도 집단동조를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상태에서 나 혼자 깨끗하고 나 혼자 바른 생각을 말한다해도 왕따를 당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간주되기 쉽습니다.
더욱 학생은 그 앞길이 지도교수의 손에 달려 있기에 악한 요구를 받아들이거나 묵인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오염된 시스템 속에서 개인은 무기력하게 따라갈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인간은 상황과 부패한 시스템의 꼭두각시일까요?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나 자신이 상황과 부패한 시스템과 싸우는 양심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계속 존재하는 악에 대해 단호하게 대응하고 선언하고 우리의 작은 마음들을 모아서 더큰 선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보면 부패한 일 , 악한 일이 발생을 하면 그 악의 원인을 판단하는데는 많은 열심을 내지만,
(사실은 그 원인 파악조차도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
그 이후에는 파악된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행동을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악을 이겨내기 위한 행동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머리에 흰 띠를 매고 거리에 나가서 데모를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집단 행동도 필요하다면 해야겠지만 , 그 이전에 스스로 양심에 따라 행동을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내 스스로 저항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악을 방관하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악입니다.

마치 죽어가는 유태인을 구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신들러처럼
동료들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의 포로 학대 사진을 외부에 공개한 조 다비처럼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당시 실험의 위험성을 깨닫고 실험 중지를 요구한 크리스티나 매슬랙처럼

양심에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영웅’이 되어야 합니다.


( 시간이 없으시면 18:56 부터 보십시오 )

특히 지금은 스마트폰의 보급, SNS의 활성화 등 평범한 영웅들에게 큰 힘을 줄 수 있는 도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시대 양심의 보루는 종교인도 , 대학도 아닙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바로 당신이 이 시대 양심의 보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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